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동기 시대 (문단 편집) == 왜 청동을 사용했는가? == 요약하자면 재료는 더 희귀했지만 가열 기술의 부재로 사용했다. [[청동]]의 재료인 [[구리(원소)|구리]]와 [[주석(원소)|주석]]은 [[철(원소)|철]]에 비해 매장량이 적고 [[강도]]도 떨어지는 편이다. 하지만 두 광물은 철에 비해 화학적으로 안정되고 녹는 점이 낮아 [[제련]] 및 [[주조]]가 철에 비해 수월하였다. 청동의 녹는점은 약 950℃인데 비해 철의 녹는점은 1,560℃로 600℃ 이상 높다. 당시의 인류는 온도를 이 정도까지 올리기가 매우 힘들었다. 별다른 조치 없이 그저 잘 마른 장작을 태웠을 때 최대 온도는 1,200℃ 정도가 한계다. 바꿔 말하면 청동이 아닌 철을 가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불꽃의 온도를 추가적으로 300℃ 이상 상승시킬 수 있는 기술이 필요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숯]]과 [[풀무]]이며 인류는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보다 높은 온도를 가열할 방법을 찾아낸 끝에 [[용광로]]를 비롯한 제철 기술을 습득해나간 것이다. 초기의 철기는 인공적으로 녹여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운석]]에서 나온 철을 이용해 만들거나 특수한 자연환경을 이용해야 했다. 고대 [[히타이트]]에선 타 지역보다 이른 시기에 철기를 도입할 수 있었는데, 이는 풀무 대신 수도 하투샤의 지형 특징 덕분에 주기적으로 불어오는 강력한 자연풍을 이용한 것이었다. 때문에 히타이트는 수도 [[하투샤]]를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할 수 없었고 타지역으로 철기를 수출하긴 커녕 자신들도 한정된 양밖에 생산할 수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 내내 철의 값이 [[금]]보다도 비쌌다. 더군다나 구리 광석을 제련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다른 금속들이 불순물로 혼입되는 일이 많아서 싫어도 자연스레 청동을 쓸 수밖에 없었다. 같은 청동기 시대의 청동기라도 주석합금이 아니라 다른 금속과의 합금이 중구난방으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 흔히 청동기 시대의 청동기를 구리+주석의 합금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불순한 구리 합금들도 대량 사용되었다. 구리는 그래도 좀 흔한 편이지만 주석은 전 세계적으로 매장지가 희소하기 때문에, 구리와 주석이 합금된 완숙한 형태로 대량생산된 지역은 극히 제한적이다. 제련 과정에서 광석에 포함된 불순물 금속들이 배합조절되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한반도]]만 해도 주석이 거의 산출되지 않기 때문에,'''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구리는 국내 광산에서 채광하더라도 주석은 외부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반도 주변에서는 중국 북쪽 [[내몽골]] 지역과 [[양쯔강]] 이남 지역에 주석 광산이 발달해 있어 고대 한국사 국가들은 이런 곳에서 주석을 수입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청동기의 또 다른 장점은 땅 깊숙히 매장되어 있거나 반응성이 높아 산화철 등의 화합물의 형태로 존재하는 철광석과는 달리, 구리와 주석은 순수한 결정의 형태로 원석이 채굴되는 경우가 있어서 좀 더 찾아내기가 쉬웠다. 하지만 구하기 쉽고 제련하기 쉽다 해도 어디까지나 이미 수많은 테크트리를 발전시켜온 지금에서나 '쉽다'라고 여겨질 수준이었다. 당시 기술로 청동을 만드는 것은 정말 토 나올 만큼 어려운 과정이었다. [[http://www.youtube.com/watch?v=8uHc4Hirexc#t=249|#]] 흔히 금이나 철 같은 금속성 매장물이 덩어리로 있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불순물 투성이이거나 가루 형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광산'을 개발하고 채산할 여력이 안될테니 얻는 양도 쥐꼬리만큼에 불과했다. 청동기 시대의 금속 채취는 모래 한 바가지 걸러내서 사금 몇 톨 건지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당시의 청동과 바위를 서로 충돌시키면 당연히 청동이 부서졌다. 청동은 매우 단단하진 않았으며, 이로 인해 청동기는 무기를 제외하고서는 대부분 권력자의 장식용, 제식(祭式)용으로 사용되었다. 당장 교과서나 관련 책에서도 이 당시의 청동기는 실생활용이 아닌 의식용이라고 못 박아놨다. 사유는 청동이 귀해서라는 이유 하나만 적었지만, 실생활에 사용하기에는 강도도 문제가 되었다. 물론 의식용이라고 해서 하찮게 볼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청동기의 등장은 인류가 그런 금속을 제련하고 가공 가능한 기술을 확보했다는 징표가 되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다. 청동보다 더 강도높은 '신소재'를 찾아나간 여정 끝에 인류가 도달한 것이 바로 '철기'인 것이다. 이렇게 단단하지도 못한 청동기가 전쟁 무기로써 사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일단 한번 만들면 돌보다 편하다는 것. 부서지거나 구부러진 청동 기구는 대장장이가 다시 녹여서 가공하면 재사용할 수 있다. 거기다 재료가 많고 거푸집이 있으면 균일하게 대량 생산도 가능하다. 비싼 건 마찬가지라서 한번 얻은 청동 갑주, 무기 등은 자자손손 전해서 사용했고 손상되더라도 녹여서 다시 만들면 그만이었다. [[헥토르]]가 그랬던 것처럼 전쟁의 주요 전리품이기도 했다. 현재와는 달리 [[기원전]] 대부분의 문명에서 사용했던 청동기와 철기는 비슷비슷한 강도를 가졌었다. 철은 반응성이 높아서 채굴했을 때 섞여있는 [[불순물]]의 양도 많고 제련 과정을 통해 그걸 제거하는 일도 굉장히 어려운데, 때문에 당시의 발달되지 않은 야금 기술로 만들어낸 철기구는 경도 면에서는 청동보다 약해서 쉽게 구부러지고 휘어졌다. 그에 비해 청동기는 구리를 제련하면서 저절로 스며들어간 불순물 금속들이 저절로 합금되어 생기는 것이고, 더 나아가 무기로 활용하기 위해 끝없는 기술 연구가 지속되어 상당한 야금 기술이 개발되어 [[중국]] [[전국시대]]의 잘 보존된 청동검은 지금도 살상에 쓸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고 한다. [[월왕구천검]]이 대표적인 사례. 당시 철이 청동에 비해 우위에 있었던 점을 굳이 꼽자면 재료 수급이 용이했다는 정도. 청동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데, 구리는 전 세계적으로 나오지만 그 수가 적고 주석의 산지는 제한적이기에 주석 산지가 아닌 경우 청동기의 대량 생산을 위해선 주석의 수입이 필수였다. 또한 청동기는 철기에 비해서 굉장한 보존성을 가지고 있다. 철은 반응성이 높을 뿐더러 한번 녹이 슬면 그 녹이 주변의 멀쩡한 조직의 산화를 가속하는 성질이 있어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물이 대부분 형태가 엉망진창인 반면, 청동을 비롯한 구리 합금의 녹은 그 자체가 강력한 산화 피막이기 때문에 부식이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막아준다. (스테인레스강이 잘 녹슬지 않는 이유도 이와 같다.) 기원후의 철기 유물은 겉에 기름이나 [[밀랍]] 혹은 [[도료]]를 바르거나, [[담금질]] 과정에서 적당히 그을려 산화 피막이 있는 상태로 두거나, 거울보다 빛나게 광을 내곤 했는데, 그 이유는 미세조직을 매우 고르고 평탄하게 만들어서 산소가 침입할 틈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표면 연마는 매우 고르기는 해도 여전히 철의 반응성은 무시할 수 없으며, 사용을 거치면서 흠집이 날 수 있기 때문에 주인의 관리가 필요해진다. 전반적인 유물의 상태만 보더라도 청동 유물은 기원전 1000년 전의 무기들이 푸른 녹이 표면에 슬어있기는 해도 형태 자체는 온전하게 남아있다. 반면 철제 유물은 기원후의 유물들조차도 무기 속까지 녹슬어서는 깨져나가고 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 가야의 철제 유물과 그보다 훨씬 이전의 유물인 청동검 유물의 사진을 비교해 보면 단박에 감이 올 것이다. 일부 보존 상태가 좋은 철제 무기들도 있긴 하지만 말 그대로 일부일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